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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즈커크

죽은 자들의 날

모스 @MOS_trek

“안 일어나?”

 

몸을 짓누르는 무게에 눈을 번쩍 떴다. 짐? 숨을 크게 들이켜며 뒤로 물러섰다. 짐은 생긋 웃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마침 삐, 삐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알람이 울려댔다. 손을 뻗어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눌렀다. 10월 31일. 0530.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기상 시간이었다. 원래는 깨워도 안 일어나던 놈이 아침 댓바람부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주섬주섬 이불을 치워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줄근한 잠옷 차림인 나와 달리, 짐은 완벽하게 유니폼을 갖춰 입은 채였다.

 

“얼굴이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별 거 아니야. 그냥 꿈을 좀…”

 

옷장을 열자마자 거울이 보였다. 짐의 말처럼 내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잠자리가 불편했던 탓이었다. 요새 밤마다 악몽을 꾸는 게, 아무래도 탐사가 길어지는 부작용이지 싶었다. 여전히 방에서 나가지 않고 있는 짐을 흘겨보았다. 3년짜리 탐사를 5년으로 늘려놓은 주범. 이번에야말로 길게 휴가를 받아 늘어지게 쉬어보겠다는 꿈은 이미 포기한 지도 오래였다. 근처 행성에서 이상한 신호가 감지된다며 그가 성화를 한 것이었다. 어쩐지 이번만큼은 부함장인 스팍도 그의 편이었다.

 

“안녕하세요, 닥터.”

“아침 식사하러 가세요?”

 

복도는 시프트를 준비하는 크루들로 북적거렸다. 짐은 웬일인지 아침을 먹겠다는 나를 따라나섰다. 평소에는 잔소리를 해도 식사를 거르려 들더니, 갑자기 철이라도 들었나. 오늘 아침 몫의 식단을 받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짐은 사과 한 알을 집어 대뜸 베어 물었다.

 

“난 아침은 이거면 됐어.”

“너 오늘 탐사 내려가잖아. 더 먹어.”

“내가? 아닌데?”

 

순수하게 의문스럽다는 말투였다. 그랬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틀렸던 것 같기도 했다. 하기야, 쟤가 직접 탐사를 내려가는 날이 하루 이틀이어야 말이지. 오늘은 조금 긴장을 풀고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메디베이로 향했다. 브릿지와 메디베이 사이의 갈림길에 서서, 짐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이따 보자.”

“내가 데려다 줄까?”

“무슨 헛소리야. 얼른 일하러나 가시죠, 함장님.”

“말도 못하나. 가, 그럼.”

 

정각에 교대를 하고 시프트를 시작했다. 특별한 미션을 수행하지 않는 날에도 환자는 늘상 있었다. 어떤 크루는 두통을 호소했고, 어떤 크루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 적당히 처방을 하고 기록을 하기 위해 패드를 두드렸다. 오전 내내 까다로운 환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 전에 알려지지 않은 우주 바이러스 때문에 고생을 했던 걸 생각하면, 이것도 내겐 작은 보상인가 싶기도 한 하루였다.

 

“사탕 드실래요?”

“사탕?”

“할로윈이잖아요.”

 

그랬었나. 채플이 동그란 사탕 몇 알을 책상 위에 올려다 주었다. 날짜가 벌써 그렇게 되었군. 짐의 생일 파티를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거의 다 흘러가고 있었다. 사탕 껍질을 하나 벗겨서 입에 넣었다. 엔터프라이즈 크루들은 의외로 명절을 꼬박꼬박 챙기는 편이었다. 해가 뜨지도, 계절이 바뀌지도 않는 우주에서, 매일 똑같은 하루를 그저 흘러가게 두지 않는 건 매우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래도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군.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웃음을 지었다. 작년에 짐이 뱀파이어 분장을 하겠다고 설쳐댔던 게 떠올랐던 것이다.

 

점심 식사에는 브릿지 크루들이 동석했다. 짐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재미없는 농담을 읊었고, 체콥을 꼭 집어 세 번이나 재미있지 않냐며 질문을 했다. 체콥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짐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스팍은 곧 도착할 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우후라도 그 신호에 대해서 말을 보탰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신호로 판단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생명체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스팍은 무거운 표정으로, 스코티에게 재정비를 부탁해야 할 것 같다고 충고했다. 짐은 식탁에서 일 얘기는 그만하자며 손을 휘저었다.

 

휴게실에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며 짐과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재촉은 하지 않았다. 짧게라도 그 여유를 온전히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기술부 크루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기장 때문에 엔터프라이즈에 조금씩 손상이 가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스타플릿 함선들은 대부분의 우주 환경에서 버틸 수 있도록 설계 되었고, 특히 엔터프라이즈 호는 그 함선들 중에서도 가장 발전된 모델에 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술부장인 스코티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문제가 발생했다면 짐이 가장 먼저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하루가 기네.”

“그래? 난 짧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없나 보지. 할 일 없으면 검진이나 받으러 와.”

“또? 어제도 봤으면서.”

“어제?”

 

이번에도 짐의 말이 맞았다. 검진을 받지 않겠다며 부득불 우겨대는 걸 겨우 설득해서 검진을 한 기억이 났다. 이상이 따로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고 있는데, 짐이 한 번 더 해도 좋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분 지 모를 일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던 참이었다. 짐과 함께 메디베이로 돌아왔다. 아직 점심을 먹고 돌아오지 않은 크루들이 몇 명 보였다. 의료부는 점심시간을 교대로 가지기 때문에 항상 이 시간대에는 메디베이가 한적한 편이었다. 짐을 빈 진찰대 쪽으로 안내했다. 허리를 숙여 높이를 조절하려는데, 주머니에서 툭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사탕이었다.

 

“사탕이네.”

“크루가 주길래. 할로윈이래.”

“그래? 나한테는 이런 거 없던데.”

“진찰 얌전히 잘 받으면 생각해볼게.”

“내가 진짜 어린앤 줄 아나봐.”

“앉으시죠. 함장님.”

 

수치는 모두 정상 범위 안이었다. 시력이 다소 걱정스러웠는데, 이번엔 많이 떨어지질 않았다. 저번의 접종 후에 항체가 생기지 않은 바이러스가 있어서 백신을 한 번 더 접종했다. 하이포를 꽂자 짐은 이럴 줄 알았으면 순순히 따라오지 않았을 거라며 투덜대었다. 주머니에 있던 사탕은 짐의 입에 들어갔다. 사탕은 받지 않을 것처럼 하더니, 막상 손에 쥐어주자 혀를 굴려가며 열심히도 먹었다.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이만 돌아가 봐.”

“뭐가 그렇게 급해.”

“일해야지. 너도, 나도.”

 

저녁 시간까지는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대부분의 시간은 저번에 발병했던 우주 바이러스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는 데 보냈다. 이번 내용을 잘 정리하면 스타플릿 함선들의 탐사 중에 발생하는 많은 의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략 내용을 정리해서 보내자 본부에서도 꼼꼼한 검토를 부탁한다는 긍정적인 회신이 왔다. 교대할 크루는 시간을 딱 맞춰 메디베이에 도착했다. 인수인계를 간단히 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는 떨어지지 않았지만, 내 하루는 이제 끝이 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짐은 스팍과 체스 게임을 했다. 나는 휴게실에 가만히 앉아서 둘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걸 지켜봐야했다. 심판이 필요하다나. 두 사람은 말싸움을 하기 위해 체스를 이용해먹는 게 분명했다. 약 30분 정도 후에 게임은 스팍의 승리로 끝이 났다. 짐은 다음번엔 지지 않을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스팍은 지금까지의 승률을 생각하면 그렇게 단언할 수 없다는 말을 던지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그렇다는 말이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일부러 짐의 신경을 긁기 위해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스팍은 우후라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에는 나와 짐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바로 자리를 옮겼다. 내 쿼터에 아껴두었던 브랜디가 있어 한 병을 가져왔다. 아껴두었던 만큼 술은 맛이 좋았다. 잔을 맞부딪히며 한 입에 잔을 비웠다. 적당히 열이 오르는 게 기분이 좋았다. 짐은 감자칩을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술자리가 길어질 모양이었다.

 

“본즈, 오늘 어땠어?”

“뭐가?”

“그냥. 할로윈이잖아.”

“뭐, 늘 똑같지. 그런 거 치곤 장식도 없고 분장한 사람도 없던걸.”

“왜? 기대했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말려들었다가는 내년엔 무슨 꼴을 보게 될지 몰랐다. 짐은 내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가끔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짐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오늘은 우리에겐 평소와 같은 특별한 하루에 불과했지만, 이 아껴두었던 술을 전부 지금 비워버린대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있잖아, 본즈.”

“응?”

“만약에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말이야.”

“뭐?”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래.”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

 

하고 싶은 말? 글쎄. 어깨를 으쓱하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잘 모르겠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사실은 할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와 있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더더욱 이 말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그와 나는 벌써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나에겐 전부 특별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의 기억, 그 무게를 그가 짊어지진 않았으면 했다. 만약 내가 너를 떠나게 된다면 너는 나를 그저 한 순간의 즐거웠던 인연으로 기억해줘.

 

“슬슬 일어나야겠네. 자러 안 가?”

“네 쿼터에 가도 돼?”

“거긴 왜?”

“그냥. 안 돼?”

 

취했나. 짐은 또 엉뚱하게 굴기 시작했다. 굳이 말릴 이유도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쿼터로 데려왔다. 쿼터 쪽은 벌써 고요했다. 하루가 고되다 보니 일찍 잠자리에 든 크루들이 많은 것 같았다. 짐을 침대에 앉혀놓고 먼저 샤워를 하고 나왔다. 물이 오늘따라 미적지근했다. 머리를 말리며 샤워실에서 나왔다. 짐은 내 책상에 놓여 있던 액자를 보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날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건 짐이 직접 찍어준 사진이기도 했다.

 

“넌 스타플릿에 들어온 걸 후회하지 않아?”

“매순간 하지. 특히 네가 탐사를 연장하거나 할 때면.”

“에이, 정말로.”

“안 해.”

“왜?”

“뭐, 나도 이 짓이 익숙해졌나보지.”

 

벗어둔 옷가지를 정리하고 짐의 옆에 앉았다. 벌써 시간이 늦었다. 책상에 올려둔 시계는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러 가지 않겠냐고 묻자, 짐은 청개구리처럼 내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짐은 한쪽 구석으로 몸을 움직이더니 옆을 탕탕 쳤다. 나더러 옆에 누우라는 소리였다. 그래, 어쩌겠냐. 결국 그가 바라는 대로 옆에 몸을 구겨 넣었다. 스타플릿에서 지급된 1인용 침대는 두 사람의 성인 남성이 눕기엔 다소 좁은 크기였다. 짐은 나를 바라보더니, 내 찡그린 표정이 우스운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넌 피곤하지도 않아?”

“않아.”

“대단하다. 너도.”

“나한텐 오늘 뿐인걸.”

 

짐은 덥썩 나를 끌어안더니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시계를 집으려고 팔을 뻗었다가, 이내 그 팔로 짐을 마주 감싸 안았다. 물리적인 시간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몸을 틀어서 그를 마주보고 누웠다. 그의 파란 눈은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밝게 보이는 것 같았다. 네가 내 우주에 함께 있어 다행이야. 앞뒤 하나 보이지 않는 깜깜하고 광활한 세계에서도, 그의 두 눈만큼은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본즈, 아까 물어봤던 거 말이야.”

“뭘 물어봤는데?”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라면ㅡ”

“아아.”

“난 하고 싶은 말 있어.”

“뭔데?”

“사랑해, 본즈.”

 

안 돼.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얼른 그를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짐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점점 투명해져갔다. 안 돼. 안 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불을 들춰보았다. 짐의 모습은 여전히 온데간데없었다. 책상 위에서, 뒤집어져 있는 시계를 집어 들었다. 0000. 12시였다. 11월 1일. 그제야 머릿속으로, 잊고 있던 정보들이 새어 들어왔다. 갑자기 달려가는 내 손을 붙잡더니 속삭이듯 말했던 너. 사랑해, 본즈. 그게, 그게 네 마지막 인사일 줄 알았더라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이 땀으로 흥건했다. 창밖으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조로 된 고풍스러운 가구들. 벽에 달린 종이 달력. 오늘은 11월 1일 금요일이었다. 엔터프라이즈 호 크루들 대부분이 실종된 지 정확히 1년 하고도 하루가 지난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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