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저&딥스페이스나인
해피 할로윈
24세기 농부 @iowacornfarr
<해피 할로윈>
이라고 쓴 글씨를 따라 오린 종이가 식당 입구를 장식하고 있었다.
"선장님, 어서 오세요! 사탕이 많이 있으니까 사양하지 말고 가져가시고요."
늑대 귀 모양 머리띠를 한 닐릭스가 활짝 웃으며 가짜 송곳니를 드러냈다. 제인웨이는 닐릭스가 건넨 마녀 모자를 예의 바르게 받아들었다. 조도를 낮춘 식당은 벽 모서리마다 걸린 가짜 거미줄과 가짜 거미 인형으로 장난스러운 분위기였다. 테이블마다 올려둔 호박 모양 바구니에는 과자며 초콜릿이며 사탕이 수북하게 쌓였고, 색색의 마녀 모자를 쓴 행복한 선원들이 의자에 늘어진 채로 과자를 씹고 있었다.
레플리케이터 사용권이 아주 많이 필요했겠군, 하고 제인웨이는 생각했다. 그는 선장답게 사기 진작 장교를 짧게 칭찬했고 닐릭스는 호들갑 떨며 더 많은 문장으로 답했다―̶̶물론 저는 지구의 모든 기념일과 축제를 공부했는데 그중에서도 할로윈은 정말 재밌는 것 같아요 분장이 으스스하지만요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하고 이웃 아이들에게 온정을 나누는 날이잖아요 조금 무섭긴 해도 말이에요―̶̶. 그러는 동안 다행스럽게도 차코테에게서 호출이 왔다.
<제인웨이 선장님, 함교로 와 주십시오.>
"지금 가겠네."
제인웨이는 아쉬운 얼굴을 한 닐릭스에게 다시 모자를 쥐여주고 식당을 떠났다.
함교로 들어서니 스테이션에 있던 장교들이 빠짐없이 돌아봤다. 차코테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제인웨이에게 보고했다.
"센서에 항로를 차단하는 무언가가 걸렸습니다. 워프를 중단하고 임펄스로 항해하는 중입니다."
"자연 현상인가?"
"거대한 인공 구조물 같습니다. 사실, 센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파악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럼 맨눈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겠군. 킴 소위, 해당 구조물까지의 거리는?"
스테이션에 서 있는 해리 킴이 패널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직선으로 약 18,000km 거리입니다."
"주의 항해 하면서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지. 패리스, 1/4 임펄스로 항로 유지하게."
"네, 선장님."
패리스의 대답과 함께 함교에 노란 경고등이 켜졌다. 선장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차코테가 도로 착석했다. 일항사는 곧장 제인웨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주의 깊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입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장거리 센서에 탐지되지 않았거든요. 워프했다는 신호도 없었고요. 빈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나 마찬가집니다."
"우리 센서가 고장난 게 아니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며."
"센서는 멀쩡해요. 그런데 저 앞에 있는 게 뭐든 간에, 그것만 탐지되지 않아요. 분명 존재하곤 있지만, 어떤 구조인지, 구성 요소가 뭔지, 질량이 어느 정도인지, 아무 정보도 읽히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서 가는 게 나을 지도요."
"그냥 돌아간다니?" 제인웨이는 걱정이 많은 일항사를 향해 웃음 지었다. "지난 4년 동안 항해하면서 우리가 언제 위험을 그냥 지나친 적이 있었나?"
"제 기억엔 없습니다."
차코테가 마주 웃었다. 제인웨이는 흡족하게 정면 창을 바라봤다.
"가시거리에 들어왔습니다." 킴이 말했다.
"최대로 확대해."
선장의 명령과 함께 전면 창을 바라보던 장교들은 곧 저마다 충격에 빠져 숨을 들이켰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함교 안에서 제인웨이는 불가항력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저랑 같은 걸 보고 있나요?"
가장 먼저 입을 뗀 패리스가 하염없이 눈을 비볐다.
그들 앞에 나타난 건 독특한 구조로 이뤄져 있는 인공 구조물이었다. 전체를 커다랗게 둘러싼 외부 링과 좀 더 작은 링 그리고 중앙 공간으로 나뉘는 삼중 구성에, 원을 삼등분한 자리마다 위아래로 뻗쳐 있는 기괴한 뿔 모양의 도킹 센터가 제법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카다시안 건축 양식을 따른 것처럼 보이는군요."
함교 근무 인원 중에서 유일하게 평정을 잃지 않은 투박이 말했다.
"저건 딥스페이스나인이에요."
말을 받는 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딥스페이스나인은 델타 분면으로 내동댕이쳐지기 전에 보이저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연방 거점이었다. 킴 소위는 살면서(물론 짧고 단순한 인생 경험이었지만) 그만큼 거만하고 위협적인 외양을 한 연방 우주 정거장을 본 적이 없었다(물론 다른 정거장은 홀로그래픽으로 봤지만). 게다가 킴은 거기서 페렝기 장사꾼에게 거의 사기당할 뻔했다. 킴은 주변에 선임 장교들만 없었어도 공황에 빠져 지금쯤 비명 지르며 함교를 뛰쳐나갔을 것이었다.
"패리스 중위, 정거장을 향해 통신해봐."
자리에서 일어난 제인웨이가 명령하자 그제야 함교 사람들 머릿속에 표준 절차가 하나둘씩 떠올랐다. 패리스가 서둘러 통신을 넣었다. "여기는 연방 스타십 보이저, DS9 응답하라." 몇 번을 반복했지만 우주 정거장은 대답이 없었다.
"통신에 반응이 없습니다. 뭔가 위장 같은 게 아닐까요?"
패리스가 말했다.
"센서가 여전히 불통입니다."
킴이 말하며 땀이 솟은 이마를 훔쳤다.
"여긴 델타 분면이니까,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크겠지."
차코테가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엔 확신이 없어 보였다. 곧이어 내부에서 선장 석으로 통신 요청이 들어왔다.
<함교, 세븐입니다.>
"말하게."
<현재 좌표를 기준으로 하여 성도를 분석했지만 주변에는 거주 행성이 없고 알려진 영공도 아닙니다.>
"그렇군. 일단 함선은 멈추고, 상급 장교들은 회의실로 모이도록."
제인웨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으로써 모두에게 어떠한 마법이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다.
———
탐사용 셔틀크래프트에는 제인웨이와 기관실장 벨라나 토레스, 세븐 오브 나인이 탑승했다. 함교는 차코테가 맡아서 통신 거리를 유지하기로 했다. 셔틀은 빠른 속도로 우주 공간을 미끄러져 나가 눈앞에 있는 정거장을 향했다. 델타 분면 한가운데에 나타난 연방 정거장은 견고하고 장엄한 자태로 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제인웨이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불이 켜져 있군."
외부에 난 창문마다 노란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들이 타고 있는 셔틀만큼 생생한 광경이었다.
셔틀 안에서도 통신을 시도했지만 한결같이 답변은 오지 않았다. 상호 통신 없이 도킹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셔틀을 세우고 구조물 안으로 직접 전송하기로 했다. 제인웨이는 도박꾼 기질이 있었다. 보이는 것과 달리 적에게 둘러싸인 낯선 곳으로 전송되거나 새로운 차원에 떨어지거나 거대한 우주 물곰의 뱃속에 들어서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만, 어쩌면 딥스페이스나인에 타게 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세 사람은 안전하게 전송되었다. 그들은 전망이 좋은 2층 복도 위에 발 딛고 서 있었다. 창 밖에는 우습게도 타고 온 셔틀이 보였다. 이색적인 소란의 한가운데에 서서 제인웨이는 적잖이 놀랐다. 사람들이 있었다. 위아래로 복도를 오가고, 광장을 가로지르고, 쇼핑하고 휴식을 취하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정거장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제인웨이는 혼란에 빠졌다. 어쩌다 보니 귀환에 성공한 걸까? 아니면 이 정거장이 통째로 델타 분면까지 떠내려온 걸까? 지금 보고 느끼는 것들이 실은 눈속임이나 홀로그램일까? 만일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속이고 있는가?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복도를 걷던 한 청년이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세븐에게 관심을 보였다. 스타플릿 유니폼을 입고 한 손에는 패드를 든 청년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얼빠진 표정인 채로 세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이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빠르게 눈을 굴려 계급장을 살핀 다음 제인웨이를 향해 인사했다.
"선장님, 안녕하세요? 어제 다른 선단과 함께 오신 건가요? 인사를 드린 기억이 없네요."
세븐과 토레스가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시치미를 떼고 제인웨이가 대답했다.
"보이저의 제인웨이 선장이네."
"딥스페이스나인 의료실장 줄리앙 바시어라고 합니다. 보이저는 처음 들어봐요. 진수식을 한 지 얼마 안 되었겠죠? 요즘 스크래치도 안 난 새 함선들이 끊임없이 이 최후의 미개척지로 모이고 있거든요. 웜홀 말이에요. 대부분 과학탐사선이라, 컨퍼런스 때보다 과학자를 더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선장님의 함선도 감마 분면 탐사 임무에 배정됐나요? 그리고 옆에 계신 분들은...”
말이 많은 청년이었다. 덕분에 제인웨이는 벌써 몇 가지 정보를 파악해냈다. 그런데 딥스페이스나인이 보이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이상했다. 제인웨이의 눈이 토레스를 향하자 그가 선장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곧바로 답했다.
“전 가서 정거장 터미널을 조사해볼게요.”
토레스가 번개처럼 사라졌다. 호기심 많은 의료실장은 그에 대해선 별로 유감이 없어 보였다.
“증강 기술인가요?” 의사가 세븐의 안와 주변을 둘러싼 기계 부속을 향해 물었다. 세븐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가 눈을 빛냈다. “아주 흥미롭네요.”
“바시어 박사, 만나서 반가웠네.”
제인웨이가 말했다. 이제 그만 사라지라는 뜻이었는데 의사는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가 산만하게 양손을 허우적댔다.
“혹시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면 의무실로 꼭 찾아와요. 이식체 보정이 필요하거나 뭐, 그런 거 있으면 말이에요.”
“안녕히 가십시오, 박사.”
세븐이 작별을 고하자 할 말이 없어진 바시어는 결국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뒤통수를 노려보던 제인웨이가 세븐에게 눈짓했다. 세븐은 한결같은 무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제인웨이가 말했다.
“오래 머물면 귀찮은 일이 생기겠어.”
“동감입니다. 그만 셔틀로 돌아가죠.”
“벨라나가 조사를 끝낼 때까진 기다려야지. 그동안 식사나 할까?”
그러자 세븐이 고개를 기울여 의문을 표했다. 제인웨이는 언제나 긴장을 잃지 않는 그의 어깨 위에 다정한 손을 얹었다.
“레플리케이터를 맘껏 쓸 기회잖나.”
그러며 제인웨이가 웃자, 아주 살짝이었지만 세븐이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
레플리매트 중앙에 있는 터미널에 접속한 벨라나 토레스는 곧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정거장은 보이저와 다른 시간대에 존재했다. 이들이 보이저의 실종 소식은 물론이고, 함선 이름마저 처음 듣는 것도 당연했다. 정거장의 시간대는 보이저가 준공되기 한참 전이었고 마키도 없을 시절이었다. 토레스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시간대가 다르다면 정거장 사람들을 통해 알파 분면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에도 다른 시간대에 있는 알파 분면 함선과 교신했다가 좌절을 맛본 적이 있었다.
두 번째로 알게 된 사실은 정거장 안에선 외부와 통신할 수 없다는 거였다. 딥스페이스나인은 환상이나 위장도 아니고 델타 분면으로 납치된 것 또한 아니었고, 단지 알 수 없는 연유로 분면간의 좌표가 중첩되어 마치 정거장이 통째로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정거장에 머무는 동안 벨라나 토레스는 알파 분면에 속해 있지만, 정거장을 나가 셔틀을 타면 다시 델타 분면에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 서로에게 통신을 보낸들 좌표가 뒤섞여 도달하지 못했다. 토레스는 의문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억지로 비우고 정거장 데이터노드를 탐색하다가 난데없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덜미를 붙잡혔다.
“벨라나?”
섬뜩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점박이 무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엔 영민한 푸른 눈동자였다. 젊은 트릴이 놀람과 반가움으로 가득한 얼굴을 코앞에 들이밀었다.
“...?”
“역시 너였구나. 나야 잣지아. 같이 공학설계 수업 들었던...”
“아.” 스타플릿 아카데미 동기였던 트릴, 기억났다. “잣지아, 오랜만이네.”
긴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은, 젊고 잘생긴 트릴이 허리를 펴고 환하게 웃었다. 그는 토레스보다 키가 한참 더 컸다.
“이젠 댁스야. 공생체의 숙주가 된 지 얼마 안 됐어.”
“잘 됐네.”
토레스는 한시라도 빨리 이 어색한 만남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델타 분면을 여행하다 아카데미 동기를 만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댁스는 토레스의 스타플릿 유니폼과 계급장을 보고 감탄하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토레스는 아카데미를 도중에 뛰쳐나와 몇 년을 방황하다 마키에 합류했었다. 만일 댁스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본다면 둘러댈 말이 없었다. 토레스는 일이 잘못될 경우 배지에 대고 비상 전송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댁스는 토레스의 걱정이 무색하게 자퇴에 관해서는 일언반구 없는 대신 갑자기 손을 붙잡고 말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보니 정말 반갑다. 널 좋아했거든.”
그 말을 들은 토레스의 볼이며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
제인웨이와 세븐은 다소 늦은 벨라나 토레스의 재합류 이후 보이저로 복귀했다.
선장은 선원들에게 주의 지침과 함께 짧은 휴가를 내렸다. 보이저의 선원들이 조를 짜서 셔틀을 타고 차례로 정거장을 오갔다. 붐비는 인파 속에 숨어든 선원들은 낯익은 알파 분면 사람들을 감격 어린 눈으로 마주하고, 프로므나드를 구경하거나 레플리매트에서 식사하며 잠시나마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을 만끽했다. 킴은 안 좋은 추억을 극복하는 의미로 패리스와 함께 쿼크바를 다시 방문했다. 그들은 고주망태가 되어 어깨동무한 채로 돌아왔다. 차코테는 정거장에 내려가지 않았지만, 전 마키 선원들이 함께 쉴 수 있도록 격려했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바조란 선원들은 귀걸이를 달고 예배에 참석해 예언자에게 기도를 드렸다. 사만사 와일드먼 소위는 딥스페이스나인에 근무 중인 자신의 배우자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지만, 매우 기뻐했다. 나오미 와일드먼은 양손에 점자 스틱을 들고 보이저로 돌아왔다. 닐릭스가 마지막으로 귀환한 그들을 반기며 따뜻하게 안아줬다.
꼬박 하루 동안 체류한 다음 보이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딥스페이스나인을 떠나 다시 귀환 항로에 진입했다. 보이저가 멀어지자, 정거장은 홀연히 사라지고 텅 빈 공간만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마치 할로윈 장난처럼 말이다.
-끝-
